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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김동훈, (주)유신 레저조경부)

조경이 곧 뜬다

어릴적 보던 드라마에서 잘생긴 주인공이 회전문을 지나 회사 출입증을 찍고 사무실로 가는 그 모습이 멋있었고, 왜인진 모르겠지만 경영학과를 나와야지 그런 곳에서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수학과 과학은 잘 못한다고 느껴서 문과가 적성에 맞는 것이라 여기고 경영학과를 나와서 출입증을 찍고 회사를 가는 꿈을 꾸었다. 아이러닉하게도 문과임에도 수능날 언어 대신 수리의 점수가 높았고, 선생님은 점수를 토대로 이공계열로 가되 자율전공이라는 학부에서 전공을 찾아보라셨다. 조경이 뜨고 있으니 그 쪽으로 가보라는 말과 함께. 조경을 배우기 1년 전이었다.

 

니들이 조경을 알아?

대학교 선배들이 술에 취해 늘 입버릇처럼 말하던 “너가 조경을 알아?” 이 말이 너무 아니꼬웠다. 얼마나 많은 고민과 성찰을 했기에 으스대고 싶었을까. 물론 그런 말을 하던 사람 대부분은 대학의 낭만만을 간직한 채 조경계를 떠났지만, 그들의 허세 가득한 그 말들은 고민의 기로에 설 때마다 조경가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 조경가는 무슨 일을 하는 걸까

 

일만 시간의 법칙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라는 책에선 일만 시간, 하루에 3시간씩 10년이란 시간을 투자하면 전문가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의 주장이 맞다면 서른 즈음엔 조경가라 말할 수준의 완성된 정체성을 확립하지 않을까 기대하며 막연하게 조경을 배웠다. 고민없는 막연한 배움은 졸업 후 또다시 고민의 기로에 서게 만들었다. 설계를 제외하고 조경이란 분야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몰랐던 뜨내기 졸업생은 조금 더 시간을 들여 정체성을 갖고자 대학원을 진학하였지만, 회사에 다니고 있는 지금 조차 정체성을 확립해가는 ‘찌랭이’다.

 

엔지니어링

엔지니어링이라는 단어는 스타크래프트에서나 보던 건데 도대체 조경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싶었다. 공원을 만들기 위해선 단순히 그림을 그리고, 그림에 맞게 만들면 되는 줄 알았고, 그렇게 설계와 시공을 하는 사람을 조경가라 부르는 줄 알았다. 공원이 공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필요한 절차를 이곳에서 배웠다. 이곳에선 설계를 비롯하여 기사시험에서나 보던 10년마다 수립하는 공원녹지기본계획, 전반적인 분야를 조율하는 코디네이팅 등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정체성

설계를 하는 것만이 조경가가 되는 것이고, 정체성이 완성되는 것이라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설계를 비롯한 여러 가지 일을 하는 박쥐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자의 합리화일 수도 있겠지만, 네이버 선생님은 조경가란 ‘조경이 대상으로 하는 공간에서 전문적 지식과 기술에 따라서 공간의 계획, 설계, 시공, 관리를 하는 것을 직능으로 하는 자의 총칭’ 이란다. 분명히 내가 하는 일 역시 조경이며, 나는 조경가이다. 다만, 조경가의 고민없이 지시하는 것만 시간에 맞춰 쳐내버리는 순간엔 조경가에서 근로자가 되는 것을 매순간 명심해야겠다. 정체성을 완성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순히 노동만을 제공하는 행위가 아닌 조경가로써 제시할 수 있는 것을 제공해줘야 하니까.

 

현재

내가 일하는 곳은 사원증으로 조악한 출입게이트를 지나는 회사로 어찌보면 어린 시절의 로망을 이루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조경을 아냐는 꼰대의 질문에 늦은 대답을 한다면 조경을 알아가고 있다. 조경의 분야에서 담당하는 일들을 모두 알 수는 없지만 나의 자리에서 하고 있는 이 일은 조경이며 그 일을 하는 나는 조경가라고 말할 수 있겠다.일만 시간 그 이상을 투자했음에도 여전히 나는 전문가(진)이며, 여전히 정체성을 완성하는 여정에 있다. 최근에 문득 내가 하는 일이 조경인지, 어느 곳에서나 하는 회사의 업무인지 모를 정도로 고민없이 일을 하던 날이 있었다. 그때의 내 모습을 반성해보고자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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