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um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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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pyright © 2017. STUDIOS terra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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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조경인의 부끄러운 고백
(남현경, LP SCAPE)
길을 걷다가 문득 겨울의 앙상한 나뭇가지만 보고도 그 나무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다. 이 일을 하다 보면 그런 사람을 종종 만날 수 있다. 그들은 다른 이가 보기에 별다를 거 없고 보잘것없는 모습을 보고도 그 이름을 부른다. 그런 사람 중 한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희미한 첫 회사 입사 면접의 한 질문이 항상 머릿속에 남아있다. “어떤 나무를 제일 좋아하세요?” 마지막 즈음의 질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면접 앞부분 질문들은 미리 생각해 본 적이 있었던 질문이라 어렵지 않게 대답했지만, 마지막 질문에선 얼어버렸다. 좋아하는 나무, 내가 좋아하는 나무가 있었던가? 어버버 하다가 그냥 생각난 소나무라고 대답했다. 소나무가 좋아할 만한 요소가 없는 나무라는 것은 아니다. 그저 조경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지금까지 좋아하는 나무 하나 없어 아무거나 말했다는 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 부끄러움은 항상 내 머릿속에 남아서 이따금 떠올랐다.
학부 때까지는 나무에 대해서 도통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꽃을 좋아하지도 않았던 나는 식물을 키워본 경험도 거의 없었다.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율무를 키우다 그 친구가 갑자기 갈색으로 말라 죽어버린 후 나는 식물을 키우는 것에 큰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학부 때 배운 수목학 시험은 벼락치기로 때우고 금방 잊었다. 답을 더 많이 맞히기 위해 나무의 결각 모양을 초사이언 머리, 슈퍼 초사이언 머리 같은 걸로 외우려고 했던 어이없는 기억만 남았다. 게다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설계만 잘하면 되지 식물은 그냥 재료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식재보다는 컨셉이 기발하고 디자인이 멋진 공간을 만드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무책임한 예비 조경인이었다.
부끄러움을 안고 입사한 첫 회사에서 식물을 사랑하는 동료들을 만났다. 나보다 식물을 많이 알고, 사랑하고, 직접 키우는 동료들을 통해 조금씩 식물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그 무렵 회사에서 억지로 배정받았던 내 첫 회사 식물 친구 ‘파비파비조팝이’(조팝나무인 줄 알고 키웠던 이 친구는 1년이 지난 후 댕강나무로 밝혀져 나를 충격에 빠트렸다)를 통해 식물과 함께하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한 식물이 얼마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물을 줄 때마다 그 친구가 나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나를 조금 더 자세히 봐 달라고 말하는 거 같았다.
시간이 흐르고 직업 특성상 식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면서 다양한 식물에 대해 더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들이 알려주는 식물에 대해 듣고 이름이나 형태 정도를 외우는 것이 다였다. 하지만 점점 그 식물들의 새로운 모습들을 현장에서 직접 보게 되고 때때로 다른 사람들은 아름답다고 느끼지 못하는 그 식물의 모습에 아름다움을 느끼는 순간이 늘어나면서 나도 식물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두 번째 회사에서 이전하는 사옥의 식재 공사에 직접 참여하게 되었다. 팀원들과 직접 대상지에 심을 나무를 고르러 다닐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핸드폰에 농장에서 만난 나무 사진이 수백 장으로 늘어 났고 내가 농장에서 만났던 나무들이 선택되어 현장으로 왔다. 고른 나무들이 직접 심겨지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작은 관목과 지피는 직접 심기도 했다. 그 친구들이 새로운 곳에서 어렵게 적응해 나가고 낯선 이 사옥에서 겨울을 이겨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모습을 일 년 내내, 매일 볼 수 있었다. 일을 하다 지치고 힘들면 나와 같이 이 낯선 곳으로 이사 온 식물들을 보면서 견디곤 했다. 모두 기억하진 못해도 그들을 보면 이름과 함께 어디서 나와 처음 만났었는지가 떠올랐고 1년 동안 변화하는 모습을 마주하는 게 인생에서 한사람, 한사람, 사람에 대해 알아가는 것처럼 내 안의 우주가 확장하는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식물은 사랑스럽지 않아도 된다. 나는 식물의 어두운 측면을 보여주고 그들에게 풍부한 개성을 주고 싶다.”
어느 전시에서 만난 세밀화 작가 케이티 스콧(Katie Scott)의 이 문장을 좋아한다. 나는 이제 무채색 겨울의 정원을 사랑하고 녹을 잃고 회갈색이 된 잎과 가지들이 햇빛에 부딪히는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정돈되지 않은 숲에서, 기이해 보이는 식물의 형태에서도 영감을 얻곤 한다. 보편적인 사람들이 식물을 아름답지 않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그 안에서 아름다움을 조금씩 찾아낼 수 있게 되었다. 식물의 모든 것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 가고 있다고 믿는다. 작가의 말처럼 식물의 다양한 개성을 이해하고 그들 본연의 특성을 고려해 좋은 자리에 데려다줄 수 있는 식물에게도 사려 깊은 설계자가 되고 싶다.
공간을 계획하고 설계하는 사람으로서 ‘식물이 공간에서 어떤 역할을 했으면 좋겠는가’에 대한 오랜 물음에 나는 어린 시절 내내 살았던 아파트 1층 계단 옆에 목련을 떠올렸다. 그 나무는 오랫동안 나에게 친구 같은 존재였다. 내가 너무 사랑했음에도 첫 면접 질문에서 그 목련을 떠올리지 못했던 건 어린 시절 나에게 그 목련이 나무 이상의 의미였기 때문이다. 그 목련에서 희고 탐스러운 꽃이 필 때마다 한해를 헤아릴 수 있었고 어김없이 돌아온 봄에 설렐 수 있었다. 세상에 많은 것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처럼 느껴져 괴로울 때도 그 목련만큼은 매년 같은 시기에 꽃을 피워 나를 위로했다. 다 변해도 변하지 않는 내가 있다고, 조금 늦거나 조금 일찍 도착할 때가 있겠지만 살아 있는 동안 늘 봄에 너를 만나러 오겠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나는 식물이 내가 만드는 공간에서 그 목련의 역할을 해주었으면 한다. 사람들에게 아직 세상이 살만하다고 느끼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지금도 나는 이별이 두려워 화분에 식물 하나 용기 있게 키우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꽃을 선물하면서도 꽃의 허리를 잘라 감상하는 그 행위를 백 퍼센트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모순덩어리다. 공부하고 공부해도 여전히 식재가 제일 어렵고 지금도 가끔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나도 모르게 식재보다 시설이나 디자인 컨셉, 이야기 같은 것을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때보다 다양한 식물 친구들을 알게 되었다. 내가 동경했던 사람들처럼 종종 식물의 볼품없어 보이는 모습만으로 그 친구들의 이름을 떠올리기도 한다. 남이 못 보는 내가 사랑하는 식물의 모습들이 머릿속에 늘어났고 내가 알게 된 그 모습들이 내가 만드는 공간에서 사람들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길 바란다.
가끔 이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의 나처럼 조경설계를 하면서도 식물이 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그들이 완전히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누구보다 조경 분야의 확장을 바라며, 나무와 풀이 없는 조경을 조경이 아니라고 말하는 편협한 사고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하지만 조경을 바탕으로 공간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나무와 풀을 어떻게 생각하고 바라봐야 할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시간이 있길 바란다. 우연찮게 이 글을 읽고 있을 당신, 조경을 더 알고 싶고 이 일을 사랑하는 당신에게 공간에서 식물은 어떤 의미일까. 혹시 생각해 본 적이 없다면 한 번쯤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가져봤으면 좋겠다. 나처럼 당신도 지나온 삶 속에서 그 답을 찾게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