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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을 마감하며

(이세희, STUDIO101)

엊그제였던 것 같은 2020 신년회를 돌아본다. 정신없이 메일을 보내고 나니 밤 9시였다. 근무지인 문정동에서 시대조경까지는 약 한 시간 정도. 잠깐 고민을 하고 어차피 늦었으니 편하게 가자는 생각에 택시를 잡았다. 도착했을 때는 이미 누군가는 집으로 향했고, 또 누군가는 거나하게 취해 있던 2차 모임 중반이었다. 코트와 가방을 내려놓고, 남은 간식거리로 허기진 배를 얼추 채우고 나서야 월간 테라의 연재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나도 연재 필자 명단에 올라있었다. 며칠 후에 12월호 담당으로 정해졌다는 소식을 받고 그래도 당장은 마감이 닥치지 않겠다는 안도감에, 이 일을 ‘으악!’ 하는 외마디 비명 수준으로만 가볍게 받아들였던 나를 반성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설계 생활의 현실

학부, 대학원 도합 6년 동안 조경 설계를 배우고 겪었지만 계속 설계를 하고 싶었다. 전공을 살려야 한다는 고지식한 생각이 들어서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아직 포기하지 못한 애정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한 번쯤은 ‘좋은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으로 설계 생활에 발을 디뎠다. 그러나 현실은 각오했던 것보다 더 녹록지 않아서, 다가오는 일들을 그저 시간 안에 해내기에 급급했다.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내놓았던 생각 속에 좋은 공간을 얼마나 녹여 내었는가를 따져보면, 처음 설계 생활을 결심했던 나를 마주하기 민망할 뿐이다.

설계의 이론적 의미는 대상지의 가능성과 문제점을 파악하여 실용적이면서 미적인 공간을 형태화하는 과정이지만, 실무를 겪으며 느낀 설계는 여러 가지 제약 조건들 속에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그 조건이라 함은, 클라이언트의 요구나 취향, 예산은 물론이고 설계자가 잠재적으로 세운 심미적 가치, 심지어는 부진한 의사결정이나 보고체계 때문에 소요된 공사 기간까지도 포함한다. 타 분야의 계산 실수로 갑자기 반으로 줄어든 예산에 맞춰 수많은 고민의 결과물들을 들어내야 하기도 하고, 공사 입찰 직전 하달된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디자인을 근본부터 흔들어야 하기도 한다. 때로는 ‘생태면적률 40% 이상’과 같은 무심히 정해졌을 지침의 수치만으로 허탈감을 맛보기도 한다.

 

슬기로운 마감을 위해 갖춰야 할 덕목

이러저러한 일을 겪다 보니, 요즘 나의 개인적 이슈는 ‘슬기로운 마감을 어떻게 이루어낼 것인가’이다. 설계의 효율성을 높이는 방법 말이다. 프로젝트 마감 때마다 ‘아니 이렇게 될 거 왜 힘을 쏟았지?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그래도 결과에 상관없이 뿌듯하다.’ 하는 생각이 교차한다. 적당히 채우자고 마음먹으면 스스로 만족할 수 없는, 단순히 ‘완료를 위한 결과’를 내게 되고, 순간마다 ‘좋은 공간’을 떠올리며 집중하자니 쉽게 지친다. 아직 정확한 균형점을 찾지 못해 일단 할 수 있는 한 후자의 자세로 임하려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체력이 유한하여 열정마저 깎아 먹게 될 날이 올 것만 같다. 그래서 늦기 전에 나만의 아카이브를 최대한 채워 나가려고 한다.

아카이브라고 하니 꽤 거창한 느낌이지만, 본질은 끊임없는 조사 및 정리와 되짚기의 반복이다. 사실, 설계의 효율성은 같은 시간 안에 얼마나 치밀하고 밀도 있는 생각을 전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와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지금 몸담고 있는 회사 소장님의 성향상, 리서치를 많이 하는 편이다. 설계 논리 도출을 위해 사례 연구, 관련 논문 및 학술지 조사 등을 거의 매번 수행한다. 역사책을 보기도 하고, 인문학책을 보기도 한다. 논문 준비를 하던 때보다는 훨씬 가벼워도, 날마다 대학원 때로 돌아간 느낌이다. 프로젝트가 끝나면 수많은 리서치 자료들이 남는데, 중심 과정에서 벗어난 자료들을 삭제하거나 참고자료로 분류하는 정리작업을 한다. 그때, 한 가지 단계를 더 거친다. 중요 자료 말고도, 스스로 생각을 숙성하고 발현하기까지의 과정들- 그 속에서 보았던 웹페이지, 사례, 논문, 현장 경험, 스케치, 회의 등을 스스로 정리하는 단계이다. 이러한 밑 작업들을 거친 후, 아주 조금이라도 성장한 나를 보며 뿌듯함을 느낀다. 설계에 몸담고 있는 한, 이 탐구 생활을 계속 반복해야 하지 않을까.

 

마무리, 다짐

올해는 정말 바빴다. 제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PM을 수행한 첫해기도 했고, 일을 수행하기만 하다 일을 분배하는 역할을 맡게 된 해이기도 했다. 결국 밀린 연차를 몰아서 가게 된 연말에도 월간 테라 과업과 함께 하는 고된(?) 2020년이 되었다. 그래도 2020년 안에 마무리 짓게 된 상황에 감사하며, 곧 다가올, 그리고 휙 지나갈 2021년의 다짐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내년에는 ‘좋은 공간 만들기’에 더 집중할 수 있기를. 더욱 촘촘하고 깊은 설계를 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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