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um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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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Install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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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부터 9월까지 이어진 주제를 유심히 보다 보니 '떠나간 놈'이란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조경 현역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떠나간 자로서의 여유로움을 이야기해주면 그들은 분노를 일으킬까, 아니면 위로가 될까 궁금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6시에 일어나 버섯을 따면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그러다 7시가 되니 장성규의 굿모닝 FM에서 부장님 개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시립대 가면 손이 시립대~’ 라고 말이다. 웃음이 나오기보다는 밀린 글쓰기가 먼저 떠올랐다. ‘아~ 해야지’
이 글은 학도이자 생존의 도구로 15년간 조경에 기생하다 35살에 귀농하여 농사꾼으로 살고 있는, 떠나간 자의 회고록이다.
좋은 놈
조경의 시작은 아름다웠다.
스무살. 대학교에 입학하여 캠퍼스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나무 이름을 익히고, 미술 시간에나 할 법한 제도, 내가 살고 싶은 정원을 설계하고 사람들이 사랑할 만한 공간을 만들어 내는 조경은 아름다웠다. 밤을 새어가며 교수님의 설계안을 답습하고, 이 선은 왜 직선이고, 왜 이 선은 곡선이니.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나 싶은 것에도 토론을 벌였다. 특히 설계 드로잉 도구 중 공사 시작의 알림펜이 되어줄 200원짜리 플러스펜의 철학적 유혹은 대단했다. 그리고 나는 자연스럽게 ‘컴퓨터 도구(최진호 후배님의 글)’ 보다는 손으로 만들어내는 설계안에 매력을 느꼈다. 나는 조경을 직업삼아 살아봐야겠다고 맹세하며 설계회사로 취직했다.
시작은 강남이었다. 역시 직장인은 양복입고 넥타이 메고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 치여야 뭔가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경인으로서 사회 생활은 청바지 입고, 후줄근한 티셔츠가 기본이었다. 지금이야 많이 좋아졌겠지만 2008년만 하더라도 잦은 철야와 주말 출근이 당연하니 편한 복장이 그저 장땡이다.
설계회사에서는 두 가지 에피소드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첫 번째 에피소드는 팀장님이 신혼 여행 이야기다. 팀장님이 당시 결혼을 하셨고, 연차를 내어 신혼여행을 가셨는데... 신혼 여행 귀국 날, 회사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이혼했다. 그 옆에 계신 팀장은 나이가 마흔 줄인데 미혼이시드라...
두 번째 에피소드는 4대강 사업으로 턴키에 미쳐있었던 때였던 것 같다. 물론 조경 회사도 녹색성장이라는 명칭아래 먹고 살기 좋은 때였다. 턴키의 시작은 이랬다. 너는 여기, 너는 저기, 너는 저~~~기로 회사의 직원들은 각 공구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그 주변에 있는 모텔을 잡아주었다. 많이 피곤하면 근처에서 편히 쉬라고 말이다. 그러나 거기가 숙소가 되었다. 새벽 5시에 보고 준비, 회의, 밤 12시 회의, 미팅에 이른 보고로 합사, 합사 앞 식당, 합사 앞 모텔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 같다. 그 때 쯤 이었던 것 같다. 타 조경설계회사 직원이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간 후에 이틀 동안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현관 앞에 쓰러진 채로 발견 되었다. 과로사였다.
그러고는 대학원으로 도망치듯 회사를 나왔던 것 같다.
이상한 놈
이상했다. 조경을 직업으로 살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해야 되는데 대학원으로 왔다.
그것도 김아연 교수님 앞에서 포트폴리오를 보여드리며, ‘저는 조경을 더 알아보고 싶고, 더 좋은 설계를 하기 위해 공부를 더 해보고 싶다’ 고 이야기 했던 것 같다. 이상했다.
대학원이란 과정은 분명히 대학교랑 달랐다. 학생과 직장인의 경계인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다양한 전공을 가지고 졸업한 동기들과 씨앗부터 남달랐던 선후배님들을 보면서 유쾌한 반란이 마음속에 일어났던 것 같다. 다시 한번 해보자고 했던 것 같다. 대학원 생활 속에서 이색적인(매니페스토?) 설계 수업과 다양한 프로젝트로 조경의 폭에 대한 인식이 커졌던 시기였던 것 같다. 그리고 설계에서는 그림과 도구빨이 아닌, 인문학적 지식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크다는 것도 살짝이나마 깨우쳤던 것 같다.
요즘 대학원을 피난처로 인식하고 접근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난 것 같다.
그 피난처 속에서 나는 조경의 다른 선로를 배우고 다시 직장인으로 복귀했다.
버티는 놈
대학원 졸업 후 두 개 회사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하나는 그래도 꽤 인지도가 있던 설계회사였고, 하나는 엔지니어링 회사였다. 물론 나는 엔지니어링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갔다.
남달랐다. 면접은 영어로 이루어지고 뭔가 체계적인(?) 퍼포먼스에 안정감을 느꼈다. 그리고 회사에 출근하고 영어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설계도 그닥..
설계 회사와는 분명히 다른 느낌이었다. 꼬박꼬박 월급도 나오고, 상여금도 있고, 출장비에 야근수당까지. 생활은 안정적이지만 내 속은 텅 빈 느낌이었다. 대다수의 일들이 법규 검토나 타부서와의 협업, 벼락치기에 가까운 설계만 하면서 4년 6개월간의 엔지니어링 생활을 이어갔다.
발주처와의 통화에서는 항상 긴장감을 가졌고, 혹시나 공무원이나 건설사의 만남은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갖고 싶지 않은 잦은 술자리들로 몸과 마음이 무너져갔다. 설계에 대한 내적 고민이 아닌 사람과의 외적 갈등이 더 힘든 생활이었다. 잘하기보다는 잘 버티기를, 설계 공모에서의 당선보다는 당선을 통한 자기부각, 자기부각을 통해 승진으로 이어지는 구조. 분명 설계 회사와는 다른 매커니즘이 존재했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설계회사로 갈지, 엔지니어링으로 갈지 고민하는 후배님들한테는 분명 고민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부제는 버티는 놈이지만 결국 버티지 못하고(않고) 떠났다.
떠나간 놈
떠나왔다. 완벽히.
처음에는 익숙지 않았지만, 4년 정도 되고나니 천상 농부체질인가 싶을 정도로 잘 지내고 있다.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농사일이 익숙해지고 나니 자꾸 눈에 이것 저것 들어온다.
저길 저렇게 바꾸고, 여길 이렇게 바꾸면... 참 좋겠는데. 참 재밌겠는데.
직업을 농부라고 말하면서도, 농사가 아닌 완전히 다른 일들을 나도 모르게 시작하고 있었다.
사람들을 모으고, 같이 할 수 있는 일을 만들고.
조경을 잘 하냐, 못하냐, 버티냐, 못 버티냐. 그게 중요한게 아니었다.
나에게 조경은 좋아하는 일이었던 것 같다. 잘하든, 못하든, 계속 눈에 보이고 생각나는 일.
요즘은 ㈜뭐하농(mohanong)의 공간을 설계하며 시공 중에 있다. 뭐하농 공간을 만들어내면서 건축가와 6개월간 콜라보하고, 조경 공간을 계속해서 손으로 그려내고 있다.
지금도 오른손엔 200원짜리 플러스펜이 쥐어져 있다. 그리고 설계를 하고 있는 여긴 회사가 아니고, 즐거운 나의 공간이다.